이틀만에 돌아오다

반려동물... 흔히 개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그만큼 인간과 친한 동물이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내에서 고양이나 개를 키운다.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심지어 어떤 이는 본인의 숫가락을 개와 같이 이용하는 장면도 TV를 통해 본 적도 있다. 솔직히 그런 모습을 보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곤 한다. 비위가 상해서이다.

내 경우 개인적으로 실내에서 동물을 키우는걸 싫어한다. 냄새와 흩날리는 털들때문에 비위생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며 얌전치 못한 애완동물이라면 그녀석들로 인해 벌어지는 혼잡함과 부산스러움이 싫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자신들이 키우는 애완동물을 이웃 사람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볼 때도 왠지모르게 불편한 심기가 들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얼마 전, 집에서 키우는 개로 인해 눈시울을 붉힐 만한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이러했다. 추석을 앞두고 지난 주말 벌초를 다녀왔더랬다. 매년 하는 벌초지만 이번엔 좀더 수월하게 끝낸 듯 싶어 화성에 있는 부모님 댁에서 여유로운 주말을 보냈다. 일요일 저녁, 집으로 오는데 출발한지 얼마 후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떠나가는 내 차를 보고 집 마당에서 키우던 보람이(아버지 말로는 풍산개와 진돗개 피가 섞인 녀석이라는데 성견으로 백구다)가 급작스레 따라가더라는 것이다.

보람이는 부모님이 연거푸 불러도 내쳐 달아나듯 내 차를 따라왔고,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차를 멈추려 할까 하다 금방 돌아오겠지 하며 무심히 기다리셨단다. 그러나 한참 시간이 흘러도 보람이가 돌아오지 않자 나한테 전화를 해서 혹시 뒤따라가던 보람이를 보았는지, 어느 길로 집에 가는 중인지 물으신거였다.

순간 걱정스런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만할 때 데려와서 성견으로 클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묶어놓고 키운 보람이였다. 최근 들어 풀어놓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지만 막상 풀어놔도 근처 산이나 동네만 휘젓고 다니다 얼마 지나면 집으로 돌아오던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동네 앞 큰길로 보람이가 나갔다면 차를 피할 줄 모르기에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전화를 하니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더란다. 동네 근처를 둘러봤지만 하다못해 차에 치인 흔적이라도 보이지 않는다며 걱정 가득한 우려만 내 보이셨다. 아내와 나 역시 십중팔구 어디선가 차에 치여 죽었을 것으로 지레짐작하며 불쌍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화요일 저녁,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기르던 개가 없어지니 집안이 쓸쓸해 풍산개 새끼를 사오셨단다. 저녁무렵 새로 들인 강아지한테 밥을 주러 마당에 나갔는데 문 밖에서 끄윽~끄윽~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무언인가가 눈에 띄어 나가보니 보람이가 문 앞에서 털북숭이 꼬리를 흔들며 앉아있더라는 것이다. 어디를 헤매고 왔는지 몸에는 가시덤풀이 여기저기 붙어있고 배는 홀쭉해져서 돌아왔더라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거졌다. 그래도 정들었던 녀석이 밖에서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꼬박 이틀만에 여기저기 헤매다 기어이 제집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감동한 것이다. 엄마는 이럴 줄 알았으면 새로 강아지 안 들이는건데 이 강아지는 어떻게 하냐면서도 기분좋다는 듯이 말하신다.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지않아 다행이고 별탈 없이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고, 그리고 그리 멍청한 개는 아닌 듯 싶어서 기쁨이 더했다. 이 녀석은 녀석의 수명이 다할 때 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란 직감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by 투덜이 | 2009/09/23 14:33 | 끄적이기...雜 | 트랙백 | 덧글(1)

200일, 200일간의 성장

노은이가 태어난지 200일이 됐다.

감기에 걸려 병원도 가고, 몇시간씩 울어대느라 엄마와 아빠의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던 노은이지만 보면 볼수록 이쁘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노은이는 잘 자라주었다.

아내 말에 의하면 노은이는 이미 동네 '스타'다.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산책할 때면 보는 이마다 이쁘고 귀엽다는 찬사가 쏟아진단다. 매일이다시피 마실나가는 뜨개방에서도 하루 이틀 안나가면 '노은이 보고 싶은데 왜 안나오냐'는 동네 언니들의 질타가 퍼부어진다니... 말로만 들어도 흐믓하기만 하다.

요즘 우리 부부는 노은이가 좀더 자라고 컸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을 즐기곤 한다. 어느 부모인들 그러지 않으랴마는 이처럼 이쁜 노은이가 유치원에 다니고 학교에 다니게되면 얼마나 이쁜 모습으로 자라 있을지, 쉽사리 상상되진 않는다.

여전히 잠투정이 심하고 낯가림으로 인해 친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제대로 귀여움을 못받지만 노은이가 자라 말도 또박또박 할줄 알게되고 재롱부리며 귀여움을 떨 때는 온 식구들이 노은이로 인해 함박 웃음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그날의 모습이 기다려지고, 그날의 행복한 순간이 상상된다.

by 투덜이 | 2009/09/13 16:44 | 노은이의 시간 | 트랙백 | 덧글(0)

분노하지 않는 자들의 세상

분노가 없다. 사람들은 더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일부만의 모습일까? 물론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부의 모습이 왜 이렇게 크게만 보이는걸까?

이번 쌍용차 사태를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많은 이들이 노조와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욕해댄다. 그 이유는 한 가지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무대뽀 점거농성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태를 이렇게까지 몰고간 정부와 사측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에 대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하다못한 빈말이라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시키는대로 일만 죽어라 해대며 가족들 먹여살리기에 바빴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불안한 미래에 놓이게 된 절박한 심정에서 살기위해 죽고자 하는 심정으로 농성을 이끌어갔을 뿐인데 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에게만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일까? 회사 경영의 책임과 애초 상하이차에 쌍용차를 건네게끔 만든 정부의 책임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왜 이러한 사태에 대한 비난과 손해는 노동자들에게만 부과되는 것일까?

이뿐만이 아니다. 용산참사를 보더라도 많은 이들이 위험한 인화물질을 들고 철탑에 올라가 불에 타 죽은 것이 그들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철거민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무리한 강경진압으로 살인을 불러온 경찰이나 이러한 사태를 수수방관해온 용산구청, 서울시, 정부에는 이렇다 할 삿대질조차 별로 없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사람들은 정작 분노해야 할 곳에 분노하지 않고 무덤덤한 시선만 보내는 것일까?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점차 공고히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라는 단어에 혹해서인지 몰라도 이 자체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신자유주의란 자본에 의한 계급화를 말한다. 자본의 세계화를 바탕으로 모든 권력은 자본에서 잉태되고 자본으로 결집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이란 그저 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할 뿐이다. 그 연장선의 오늘날의 모습이 노동유연화로 점철된 비정규직의 양산과 88만원 세대의 절규이다.

이미 모든 사회적 가치와 담론은 경쟁이란 체제에 녹아들었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영어조기교육은 '내 자식만큼은'이라는 가족주의와 일등우선주의에 의해 파생된 교육경쟁의 전초전이다. 이렇듯 유치원부터 시작된 교육경쟁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서 정점에 이르른다. 대학이란 것이 한낱 학벌을 위시한 상층계급으로의 발판 구실밖에 못하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학벌을 갖기 위한 경쟁은 공교육의 몰락과 더불어 사교육의 황금시대를 불러왔으며, 반대급부로 학생들은 점차 사회적 인간으로서 쌓아야할 교양과 상식, 덕목은 거세당한 채 정글의 법칙에 눌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만을 최고의 선으로 체득하게 된다.

이러니 지성인의 요람이라 할 대학조차 영어와 고시, 학점관리에만 매달릴뿐 대학 본연의 기능이 말소된지 오래다. 지성인답게 비판과 토론, 다양한 이념과 논리, 각양각색의 가치관과 행위들이 생기롭게 넘쳐나야 할 대학은 죽은 지성들만이 캠퍼스를 누비며 오로지 전문직과 대기업 취업만이 최선임을 스스로도 당당히(!) 외치고 있다.

비판기능이 상실된 젊은 지성들의 보수화는 보수언론들에겐 좋은 먹잇감이다. 시대를 볼줄 모르며, 가슴끓는 분노를 느껴보지 못하는 그들은 장차 보수언론에서 물어다주는 정보만 삽입당한 채, 오로지 연봉 000천만원만 되뇌이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다 결국 끝내 오르지 못하는 유리천정에 가로막혀 개인탓만 하면서 세상에 대한 부질없은 욕설만 내뱉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이 과연 어느 소수만의 문제일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갖은 모순과 사회부조리, 반서민적이고 반민주적인 행태들의 영향이 우리들 앞에 벌어지지 말란 법이라도 있던가? 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을 한다는 말인가?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지금 사람들은 뉴스를 봐도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를 하더라도 행동하지 않는다. 행동할줄 모른다. 그러니 계속 당하기만 할 뿐이다. 무엇이 진정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력조차 없다. 같은 노동자끼리 치고박고 싸운다. 없는 집에서 태어나 동네 양아치로 껄렁거리다 어디 일자리라도 있다면 철거용역으로 스스럼없이 나가 같은 처지의 철거민들에게 주먹과 욕세례를 퍼붓는다. 집없는 서민이면서 나도 한번 강남 사람처럼 잘 살아보겠다고 한나라당 후보를 찍었다며 대놓고 말한다. 회사의 부실경영에 대한 책임이 경영자에게 있음에도 정규직,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서로 뒤엉켜 제살길만 찾겠다고 서로 으르렁거린다. 전경으로 차출돼 부모와 같은 농민들에게, 삼촌 형 누나뻘 같은 노동자/시민들에게 곤봉을 갈겨댄다.

이런 상황을 만든 당사자들은 흐믓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한다. 저렇게 해야 그네들의 공고한 기득권이 유지될테니 말이다. 정말 슬픈 현실이다. 가슴아픈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적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진보정당 및 시민단체, 발벗고 나서는 시민들에 대해 이해관계에 얽혀있거나 제대로 사리분별 못하는 사람들은 싸늘한 눈초리로 냉소를 보내기 일쑤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여기에는 많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해방부터 이어져 온 친일파 기득권세력들의 그 철저한 변주와 자기위장, 그로인한 견실한 사회구조 기반 마련 실패, 이후 지속돼온 군사독재와 신자유주의의 망령들이 건강한 사회로 발돋움하려는 우리 사회의 발목을 시시때때로 후려쳤다. 이런한 분위기에서 그나마 이룩해온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쥐새끼 정권이 들어선 이후 모래위의 성처럼 하루아침에 무너지며 퇴보를 거듭하고 있다.

친일반서민 정당인 한나라당의 반민주적 강행처리로 밀어부친 미디어법이 그 결정타다. 그나마 실눈처럼 보여지던 정론과 진실접근에 대한 통로마저 가려지게 됐다. 아는게 없으니 당할 수 밖에 없다. 광우병 파동과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파렴치한 행위들(YTN 사장 낙하산, PD수첩 제작진 구속, KBS사장 교체), 삼성공화국 손을 들어 준 에버랜드 전환사채 대법원 판결, 노 전 대통령 조문정국과 맞닿은 경찰의 폭력행위, 용산참사, 쌍용차 사태, 제2롯데월드 건축 승인, 전교조 및 전공노 탄압 및 이에 따르는 명백한 위헌 행위들.... 손으로 입으로 헤아릴 수 조차 없다.

이런 수많은 탄압행위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네들은 분노조차 표현하지 않는다. 피곤해서였을까? 해도 안된다는 무력감일까? 차라리 이런 감정이라도 느끼는 이들이라면 눈물날 정도로 고맙겠다. 적어도 그렇게 느끼기까지 가슴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보여줬을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벌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남일 바라보듯 바라보는 이들이 주변에 대다수다. 되려 쥐새끼 정부를 옹호하려는 자들도 넘쳐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할 말은 정말 많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쏟아내려니 한숨부터 나온다. 마지막으로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말을 끝으로 이만 맺는다.


그들은 처음에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침묵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노동조합 운동원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노동조합 운동원이 아니었기에 침묵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때는 나를 위해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by 투덜이 | 2009/08/07 17:15 | 프로파간다 | 트랙백(1)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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